| HOME | 선교회소개 | 재학생모임 | 지회별모임 | QT나눔 | 중보기도 | 아나바다 | 자유게시판 | 방명록 | 자료실 |

회원등록 비번분실

  자료실 바로가기  
특강자료실
설교자료실
일반자료실
사진자료실
월요모임
수련회/세미나

  링크 사이트  
대한예수교 장로회총회
기독신문
성서유니온선교회
뉴스앤조이
 
 
 

전체방문 : 30,324
오늘방문 : 4
어제방문 : 7
전체글등록 : 2,461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141
댓글및쪽글 : 2428
 notice
설교자료실
작성자 zeja
작성일 2004-02-05 10:23
ㆍ추천: 0  ㆍ조회: 2894      
삼상강해6 (4:1-22)"어찌하여 패하게 하셨는고?"
어찌하여 패하게 하셨는고?

삼상 4:1-22
권투선수가 링 위에 올라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하는 일이 있죠? 그렇습니다. 주먹다짐을 하기 전에 눈 싸움을 먼저 합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우습기 그지 없지만 본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경기를 승리로 이끄느냐 아니냐가 판가름 하는 일이기에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얼굴을 들이 밀고 눈 싸움을 합니다. 이 때 만약 어느 한 편에서 고개를 돌려 상대방의 눈길을 피한다면 “그 싸움 보나 마나이겠는 걸”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그럴 일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지만 제가 좀 젊었을 때는 종종 지나가는 개들과 재미 삼아 눈싸움을 벌이곤 했었습니다. 물론 아무 개나 눈싸움을 했던 것은 아니고요. 저를 향해서 살기를 품고 사납게 짖는 개들과는 어김 없이 눈 싸움을 하곤 했었습니다. 사납게 짖는 개들을 쫓아 내기 위해서 소리를 지른다든지, 돌멩이를 던지는 일등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이런 일들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개들도 잘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싸움,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있다면 민망스러운 일이 될 수 있겠지만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이 때는 이것 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지 않을 까 싶습니다. 아무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사납게 짖는 개를 물리칠 수 있으니까요. 개와 눈 싸움을 해 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눈을 불알인체 움직이지 않고 개의 눈을 처다 보면 개도 처음에는 으르렁 거리면서 저를 처다 봅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곧 꼬리를 내리고 “으으응” 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뒷걸음질을 치죠. 기 싸움에서 저한테 진 것입니다. 한바탕 멋지게 싸워 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이렇듯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의 사기를 꺾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군사와 대단한 화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기 싸움에서 지면 그 싸움은 해 보나 마나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대단한 화력을 지니지 못했다 하더라도 사기 충천하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능한 장수일수록 자신이 거느리는 병사들이 사기충천할 수 있도록 합니다. 마치 유능한 감독일수록 자신의 선수들이 경기 당일 최고의 컨디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 사기충천해 있는 군사들과 사기가 꺾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군사들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이 둘이 이런 감정을 갖고 전쟁을 치른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느 쪽이 이기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기충천해 있는 군사들이 훨씬 더 유리한 고지에 서 있음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쟁을 하지 않아도 뻔한 결과가 예측되는 싸움입니다. 한쪽은 이겨 놓고 싸우는 격이고 다른 한 쪽은 진 싸움을 싸우는 격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싸움이 오늘 본문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한 쪽은 사기충천해 있고 다른 한 쪽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예측한 결과가 아닌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기충천했던 군사는 쓰라린 패배를 맛 보게 되고 두려움에 떨었던 쪽에서는 큰 승리를 맛보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도출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무엇이 어떻게 잘 못되었길래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살펴 가면서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이긴 싸움을 질 수 있는지, 어떻게 진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의 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번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했으나 이내 전열을 정비하고 두 번째 전쟁을 치룹니다. 자 이 두 번째 전쟁이 있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리적인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함께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함께 5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여호와의 법궤가 이스라엘 군사들이 있는 진영으로 들어 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 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느 정도로요? 네,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는 이 함성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기 충천해서 기를 흔들고 칼을 흔들면서 소리를 지르는 군사들의 모습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이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이 소리를 들은 블레셋 군사들은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이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6절을 살펴 보면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진정한 이유를 엿 보게 됩니다. 함께 6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진중에 들어 왔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은 진영을 의미합니다. 즉,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도열해 있는 진 가운데로 궤가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 이들은 두려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은 이들이 이 일로 인해 얼마나 두려워 하고 있는가를 엿 볼 수 있습니다. 함께 7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여기 보면 화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오이”라는 말로서 비탄에 젖었을 때 내 뱉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절망에 찬 소리라는 것이지요. “아~” 이렇게 말입니다. 이 말 속에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이제는 틀렸구나, 이제 우리는 큰일 났구나 뭐 이런 뜻이 이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8절에서도 반복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블레셋 진영은 이 일로 인해 상당한 두려움을 느낀 것처럼 보입니다. 그야 말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블레셋 사람들은 왜 궤가 들어 온 것에 대해서 이렇게 큰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서 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들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했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을 한지 상당한 세월이 흘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했던 모습은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에 정탐꾼을 보냈을 때 기생 라합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여호수아 2:9-11절은 이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9절을 보면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즉, 이들은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11절을 보면 정신까지 혼미해서 잃을 정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일이 생겼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당시 세계 최강의 화력을 지닌 애굽 군대를 몰살 시키지 않았습니까? 역사 학자들에 의하면 이 때 홍해가 갈라져 애굽의 주력부대가 수장 되고 난 다음 애굽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줄어 들었다고 합니다. 즉, 쇠퇴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치뤘던 전쟁 소문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전쟁이 있을 때 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궤를 앞 세웠던 것입니다. 요단강을 가를 때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법궤를 앞세우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법궤의 위력을 익히 잘 아는 블레셋 군사들로서는 간담이 서늘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아~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하고 낙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있었던 바로 그 일 간담이 서늘하게 되는 일이 오늘 사무엘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도 하기 전에 이미 이긴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반대로 블레셋의 입장에서 보면 진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싸움입니다. 물론 9절을 보면 자기 군사들을 향해 격려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미 마음은 큰 절망감에 사로 잡혀 있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이상한 양상으로 전개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길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이 패하고 패 할 수 밖에 없었던 블레셋 사람들이 승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10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전쟁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참패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사의 전체적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30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맙니다. 여러분 이것은 상당한 것입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국가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만한 엄청난 패배를 맛 보고 맙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기 충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패를 하고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블레셋은 승리를 하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 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전쟁이 어떻게 전혀 다른 엉뚱한 결과를 도출해 버리고 말았을까요?

저는 오늘 아침에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는 지를 말입니다.

오늘 이 사건을 단적으로 보면 아무리 결과가 뻔한 것이라 하더라도 뻔하지 않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아무리 예측 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예측을 빗나가는 일이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첨단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첨단의 장비를 동원해 별의 별 것을 다 예측해 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불가능 했던 일들이 이제 그렇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태 속에 있는 유전자를 통해서 이 아이가 장차 어떤 병치레를 하게 될 것인지 까지 예측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젠 가게 하나를 오픈 하더라도 예전과 같이 주먹 구구식으로 해서는 성공 할 수 없습니다. 갖가지 통계를 동원해 그곳에 과연 그 가게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연구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설사 그렇게 예측 가능하고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통계나 최 첨단 기계설비 또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그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해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도 그렇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무엇이 오늘 본문의 상황을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의 예측을 빗나가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함께 3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1차 전쟁에서 실패하고 난 다음의 일을 기록한 본문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뭐라 합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라고 말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라고 해석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입장이 좀 다릅니다. 저는 이들이 불만스럽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앞에 벌어진 문제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왜 이런 문제가 일어 났는지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들의 1차적인 분석은 맞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1차적인 분석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패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이 전쟁은 여호와께서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1차로 분석한 원인은 정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1차 분석을 토대로 해서 내린 결론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들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정확하게 서술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한 행동을 통해서 이들의 문제를 엿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지고 오는 일입니다. 아마 이들도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는 동안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 언약궤를 앞 세워 승리 했던 일을 기억해 낸 듯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언약궤를 앞 세워 전쟁에 임하면 승리 할 것이라고 생각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전쟁에 패한 원인을 어떻게 분석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정리를 한 것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엿 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 1차 분석은 잘 해 놓고 결론을 내릴 때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업에 실패를 했을 때,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서슴없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가정에 이런 문제를 두셨을꼬 하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즉, 이 문제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제에 대한 그릇 된 처방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저는 여러분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분석하실 때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분석을 하기 위해서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지체들과 상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은 나 보다 그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 훨 씬 더 넓은 안목을 갖고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보다 신앙이 어린 사람과 상담해서는 곤란합니다. 만약 신앙이 어린 사람들과 상담을 하면 더 문제가 꼬일 수 있습니다. 대게의 경우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해결 방법이 세상적입니다. 즉, 신앙 안에서 해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적인 방법으로 해결 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가 필요한데, 기도 보다는 돈으로 해결 하도록 권면 합니다.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데 세상 법정에 송사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종종 신앙인들이 하는 실수가 영적으로 장성하지 못한 사람들과 상담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선배라고 나보다 좀 더 배운 것이 있어 보인다고 내 고향사람이라고 내 동료라고 해서 조언을 구합니다. 아닙니다. 신앙인들과 상담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 도 그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애를 써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잘 못된 결론은 잘 못 된 행동으로 연결 되는데요. 이들이 내린 잘 못된 결론으로 인해 이들은 잘 못된 행동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 궤로부터 주술적인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어떻게 문제를 처리 했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물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들이 임의대로 결정을 해 버리고 맙니다. 언약궤, 이것은 주술적인 힘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했을 때는 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가기만 하면 승리를 했습니까? 또, 왜 이것을 앞세우고 나가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눈을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언약을 맺은 표시입니다. 따라서 이 언약의 표시를 앞 세우고 나갈 때 승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시인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기록 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들이 살고 있었던 당시는 사사시대 였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사사시대를 대변하는 문장 하나를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왕이 없음으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말 말입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을 살지 않는 시대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들의 문제는 언약궤를 앞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언약궤의 주술적인 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하나님 백성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날 지켜 주실 것이야, 평일 날 삶은 엉망으로 살면서 주일날 하루 출석하는 것으로 내가 주일날 이렇게 출석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내 삶을 지켜 주실 것이야. 라는 생각들 말입니다. 물론 주일날 교회 출석하는 것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을 지켜 주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지켜 주는 것은 여러분이 내는 헌금 액수도 아니고 여러분이 교회 출석한 횟수도 아니고 여러분이 주님 앞에 봉사한 봉사 이력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여러분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여러분을 가려 줄 우산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우산, 여러분의 삶의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해져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종종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허황된 꿈을 안고 살아 갑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날 극한 환란 속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목만 남아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온데 간데 없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목만 가지고 있으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한다면,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혹 여러분도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명목만 남아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길 수 밖에 없었던 전쟁을 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기억하십시오. 그 이유는 바로 명목, 명목만 남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명목만 남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기 충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패배로 이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명목만 남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에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패배의 길로 들어 서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명목만 남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로 분석하시고 그 문제에 대해서 바르게 대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이들이 이 전쟁에서 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의 범죄 함과 그 범죄를 용인해 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이 오늘 본문에서 시행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가 아무리 충천했다 하더라도 이미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시행하실 작정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 이 부분에 대해서 좀더 말씀을 살피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하는데요.
함께 11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또 1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 엘리 역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죠. 자 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엘리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전쟁이 이런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엘리와 그 아들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것이 분명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런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통해 또 다른 것을 의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이 전쟁을 통해 누가 처단되죠? 그렇습니다. 엘리와 그의 아들들이 처단 됩니다.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네,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인도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오히려 저들을 패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죠. 그렇다면 이 전쟁을 통해서 이들이 처단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영적인 성장을 가로 막고 있었던 사람들이 제거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정화는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는 어떤 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사무엘을 역사의 무대 중심으로 등장시키는 그런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전쟁의 실패는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길 수 밖에 없는 전쟁을 졌다는 것에 대해서 크게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그 일이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의 생활 중에도 얼마든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다 이긴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실패 할 때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믿음의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우리에게 해로운 것처럼 보였던 일들이 오히려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예가 노무현씨의 단일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몇 일 전 노무현씨 진영의 한 국회위원이 이런 이야기를 했더군요. 노무현씨가 국민경선으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 되고 난 다음 당했던 일들은 누가 배신자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어느 신문사 사설에서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라는 제목으로 이번 파동에 당을 떠난 사람들의 이름들을 열거하면서 기회주의자임으로 국회위원이 될 자격이 없음을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것은 우리 사랑하는교회가 소속해 있는 이 지역 국회위원 이름도 거기에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여러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자신들의 손으로 뽑아 놓고 한 번 힘을 모아 밀어 보지도 않고 내가 원하던 사람 당선 안되었다고 떠나 갔다가 이제 지지율 올라간다고 몰려 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믿고 나라를 맡긴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도박인지…  
이야기가 잠시 다른 대로 흘렀는데요. 아무튼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실패는 당장 볼 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겠습니까? 더욱이 자신들이 애지 중지 했던 법궤마저 빼앗겨 버리는 수모를 당했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오히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한 시대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기점이 되는 사건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어떤 사건을 바라 볼 때 표면적인 것만 바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표면적인 것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섭리하시고 역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이런 눈만 소유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패배의 쓰라림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더 멋지게 살아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표면적인 것만을 가지고 낙심하고 좌절하시는 여러분이 아니라 그 이면, 그 이면에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인하여 잠잠히 기다릴 수 있는 멋진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윗글 삼상강해7(5:1-12)"블레셋의 어리석음"
아래글 삼상강해 5 (말씀이 희귀한 때) 3:1-4:1a
Copyright @ since 2001-2009 제자선교회 (ZEJA.ORG) all right reserved.
문의메일 : such0190@dreamwiz.com / 전화 : 010-2677-0796
주소 : (우) 790-833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생지리 410-14